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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하게 살면 호구가 된다는 말, 한 번쯤 들어보셨을 겁니다. 그런데 저는 거꾸로 묻고 싶었습니다. 애초에 우리 사회가 착한 사람이 손해를 보도록 설계된 건 아닐까? 어릴 적 지하철역 계단 아래에서 아코디언을 연주하던 장애인 어르신의 모습을 떠올리다가, 문득 그 풍경이 언제부턴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순간부터 이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보이지 않는 벽 — 거리에서 사라진 사람들
제가 초등학생이던 시절, 전통시장 입구나 지하철 환승 통로에는 으레 그런 분들이 계셨습니다. 한쪽 다리가 없거나, 앞을 보지 못하거나, 발달 장애를 가진 분들이 구걸을 하거나 소박한 악기 연주로 하루를 버티고 있었죠. 어린 마음에는 솔직히 무섭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는데, 그래도 그 존재들이 일상 속에 함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른이 되어 돌이켜보니, 그 풍경이 어느 시점부터 깨끗하게 지워졌습니다. 복지 제도가 촘촘해져서 그분들의 삶이 나아진 것이라면 정말 다행이겠지만,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그들이 사라진 자리에는 온기 대신 매끈한 상업 광고판이 들어섰으니까요.
사회학에서는 이런 현상을 '사회적 배제(social exclusion)'라고 부릅니다. 사회적 배제란 특정 개인이나 집단이 경제·문화·관계망에서 체계적으로 밀려나 정상적인 사회 참여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눈에 안 보인다고 해서 없어진 게 아니라는 뜻이죠. 실제로 보건복지부의 장애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국내 등록 장애인 수는 264만 명을 넘어서지만(출처: 보건복지부), 이들의 공공장소 접근성과 사회 참여율은 여전히 비장애인 대비 현저히 낮습니다.
천명관 작가가 소설 『아코디언』에서 묘사한 1950년대 앵벌이 공동체는 단순한 과거 이야기가 아닙니다. 전쟁 직후의 고아들, 신체 결핍을 가진 아이들이 거리를 누비던 그 시절과, 지금 우리가 사는 도시의 풍경 사이에는 생각보다 얇은 막 하나만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달라진 건 그들의 삶이 아니라, 그들이 우리 눈앞에 존재하느냐 아니냐였던 겁니다.
결핍의 존재들이 거리로 나설 수 없게 된 이유는 단순하지 않습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격리한 것이 아니더라도, 사람들 마음속에 쌓인 불편함과 외면이 보이지 않는 장벽, 즉 '심리적 게토화(psychological ghettoization)'를 만들어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심리적 게토화란 물리적 격리 없이도 특정 집단이 사회의 주류 공간에서 스스로 위축되거나 밀려나는 심리적·문화적 고립 현상을 말합니다. 제가 직접 겪어보니, 그 장벽은 법이나 제도가 아니라 무관심한 시선 그 자체였습니다.
- 국내 등록 장애인 264만 명 이상, 그러나 공공장소 가시성은 점점 낮아지는 추세
- 사회적 배제는 제도적 격리가 아닌 '보이지 않는 벽'으로도 작동한다
- 1950년대 결핍 공동체와 현대 도시의 소외 구조는 형태만 다를 뿐 본질은 유사하다
- 심리적 게토화는 타인의 결핍을 마주할 기회 자체를 차단한다
사회적 배제를 넘어 — 착함이 손해가 되지 않으려면
그때 느낀 건, 타인의 결핍을 직접 마주하는 경험이 사라지면 공감 능력 자체가 근육처럼 퇴화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어릴 때 그 지하철역 계단 아래에서 느꼈던 안타까움, 그 감정이 쌓여서 지금의 저를 만들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마주침이 없는 세대에게 "착하게 살아야 한다"라고 말하는 건, 수영을 한 번도 보여주지 않고 "물에 들어가라"라고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연대(solidarity)'라는 개념이 여기서 중요해집니다. 연대란 단순히 도움을 베푸는 자선의 차원을 넘어, 서로의 취약성을 인정하고 그 위에서 함께 버텨내는 사회적 계약에 가깝습니다. 착함을 개인의 도덕성 문제로만 볼 것이 아니라, 연대를 가능하게 하는 구조와 제도가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OECD 사회지출 통계에 따르면 사회적 신뢰 지수가 높은 나라일수록 GDP 대비 사회지출 비율도 높으며, 개인의 친사회적 행동 빈도 역시 유의미하게 높게 나타납니다(출처: OECD).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착함이란 타고난 성격의 문제라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착한 행동을 가치 있게 여기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반대로 성과와 효율만 칭송받는 환경에서는 가장 선한 사람도 점점 계산적으로 변해갑니다.
여기서 핵심은 '승자독식(winner-takes-all)' 구조입니다. 승자독식이란 경쟁의 결과가 소수에게 극단적으로 집중되고, 나머지 다수는 보상에서 완전히 배제되는 경제·사회 구조를 의미합니다. 이 구조가 고착될수록 착하게 사는 것은 실제로 손해가 됩니다. 연민이 전략적 약점으로 해석되고, 배려가 호구의 증거가 되는 거죠. 저는 그것이 개인의 인성 문제가 아니라, 구조가 만들어낸 합리적 반응이라고 봅니다.
그렇다고 제도에만 기댈 수는 없습니다. 타인의 결핍을 일상에서 마주하고, 그 불편함을 외면하지 않는 감각을 되살리는 것이 먼저입니다. 1950년대 앵벌이 아이들이 보여준 것처럼, 가장 가혹한 환경에서도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보장된 미래를 내려놓는 선택은 가능합니다. 그런 선택이 '어리석음'이 아닌 '숭고함'으로 읽히는 사회가 되어야, 착함이 비로소 손해가 아닌 가치가 됩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착하게 살면 진짜 손해를 보는 건가요?
A. 단기적으로는 그렇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제가 직접 겪어보니, 배려하는 쪽이 먼저 양보하고 손해를 감수하는 상황이 반복되더라고요. 하지만 이건 개인의 선함이 문제가 아니라, 그 선함을 지켜줄 구조적 안전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착함 자체가 문제인 게 아니라, 착한 사람을 보호하지 못하는 시스템이 문제입니다.
Q. 소외된 사람들이 거리에서 안 보이는 게 복지가 좋아진 결과 아닌가요?
A. 복지 향상이 일부 기여했을 수는 있지만, 그게 전부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등록 장애인 수는 오히려 꾸준히 증가하는데 거리의 가시성은 낮아졌다는 것 자체가 단순한 복지 개선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사회적 배제, 즉 이들이 공공 공간에 나서기 어렵게 만드는 심리적·문화적 장벽이 동시에 작동한 결과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Q. 공감 능력은 타고나는 건가요, 길러지는 건가요?
A. 제 경험상 공감은 근육에 가깝습니다. 어릴 때 결핍을 가진 분들을 일상에서 마주했던 경험이 지금의 감각을 만들었다고 느끼거든요. 선한 행동을 가치 있게 여기는 사회적 분위기, 그리고 타인의 어려움을 직접 마주하는 경험이 반복될 때 공감 능력은 자라납니다. 반대로 그런 마주침이 사라지면, 공감도 서서히 퇴화할 수 있습니다.
Q. 천명관 작가의 『아코디언』은 어떤 내용인가요?
A. 1950년대 한국전쟁 직후를 배경으로, 고아와 신체 결핍을 가진 아이들로 이루어진 앵벌이 공동체의 삶을 그린 소설입니다. 착취와 폭력, 배신이 뒤엉킨 가혹한 현실 속에서도 자유 의지와 희생, 연민이 공존하는 인간의 복잡한 면모를 입체적으로 담아냈습니다. 10년 만에 발표한 천명관 작가의 신작으로, 잊혀가는 한 시대의 민중적 삶을 문학으로 복원했다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결론
어릴 적 지하철역에서 보았던 그 아코디언 소리가 지금도 가끔 귓가에 맴돌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그저 지나쳤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 불편한 마주침이 저를 조금이나마 더 나은 방향으로 만들어줬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감각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건 효율과 성과뿐인 사회라면, 착하게 사는 것이 손해처럼 느껴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릅니다.
착함이 호구가 되지 않으려면, 개인의 선의에만 기대서는 안 됩니다. 연대를 뒷받침하는 제도적 구조가 필요하고, 그보다 먼저 소외된 이들의 존재를 일상에서 다시 마주하려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오늘 하루, 눈앞에서 불편하게 느껴지는 누군가를 그냥 지나치지 않는 것에서 그 시작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