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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에 존재하는 물질의 99.9999%는 죽어 있습니다. 생명이란 오히려 예외적이고 불안정한 상태입니다. 이 사실을 처음 마주했을 때 저는 이상하게도 홀가분해졌습니다. 아등바등 살아가는 게 부끄럽다기보다, 이 작은 생명이 기적처럼 느껴졌달까요.

죽음의 물리학 우주적 맥락에서 보면, 삶은 사고다
아이를 키우며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을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걸까.' 세상은 빠르게 돌아가고, 커리어는 멈춰 있고, 아이 밥 먹이는 일 말고는 이렇다 할 성취가 없는 하루가 반복됐습니다. 그 무력감의 정체를 좀처럼 설명하기 어려웠는데, 물리학의 언어를 빌리고 나서야 조금 납득이 됐습니다.
물리학에는 '열역학적 불안정 상태(thermodynamic metastability)'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여기서 열역학적 불안정 상태란, 에너지가 낮아지려는 방향으로 언제든 붕괴할 수 있지만 일시적으로 높은 에너지를 유지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쉽게 말해, 생명체가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바로 이 불안정한 상태입니다. 돌은 1억 년을 버팁니다. 반면 인간은 그 견고함을 갖추지 못한 대신 잠깐 동안 뭔가를 느끼고, 생각하고, 의미를 만들어냅니다.
망원경으로 우주를 훑어보면 태양과 같은 별이 1조 곱하기 1억 개쯤 됩니다(출처: NASA). 그 모든 것이 기본적으로 죽어 있습니다. 지구조차 반지름 6,400km 중 생명이 존재하는 구간은 지표면 위아래로 겨우 10~20km 수준입니다. 지구 전체로 보면 생명이 '살짝 묻어 있는' 수준이죠. 이 사실을 직접 찾아보고 나서야 비로소 제가 느끼던 무력감의 뿌리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삶이 힘든 게 아니라, 삶이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어마어마한 일이었습니다.
- 우주 전체에서 생명은 표준이 아니라 예외에 해당합니다
- 생명은 물리학적으로 '불안정한 고에너지 상태'이며, 언젠가 더 안정된 상태(죽음)로 돌아갑니다
- 지구 생명권은 전체 지구 크기 대비 0.3% 미만 구간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의미 부여라는 인간만의 생존 전략
철학자 알베르 카뮈는 "철학적으로 진지한 단 하나의 질문은, 왜 우리는 자살하지 않는가이다"라고 했습니다. 처음 이 문장을 접했을 때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너무 직접적이라 당황했지만, 읽을수록 오히려 정직한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카뮈가 말하는 핵심은 '부조리(absurdity)'입니다. 부조리란 인간이 삶에서 의미를 찾으려 하지만 우주는 그 어떤 의미도 내어주지 않는 간극, 그 충돌을 가리킵니다. 쉽게 말해, 삶의 목적을 찾고 싶은 인간의 욕망과 원래 아무 목적이 없는 우주 사이의 간격이 부조리입니다. 그리고 카뮈는 그 부조리를 직면하면서도 반항하며 살아가는 것이 인간적인 태도라고 봤습니다.
진화생물학적으로도 이 구조는 설명됩니다. 다세포 생물은 '개체가 죽는 대신 DNA 정보를 자손에게 전달하는' 방식으로 영속성을 추구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출처: Nature Evolutionary Biology). 인간 몸은 진화적으로 30~40년 정도를 버티도록 최적화되어 있으며, 그 이후는 이른바 '보증 기간이 지난 가전제품'처럼 여기저기서 고장이 납니다. 노화란 특정 질병이 아니라, 수명 보장 범위를 벗어난 이후 벌어지는 모든 종류의 손상이 중첩되는 현상입니다.
제가 직접 경험해 보니, 이 이야기가 가장 위로가 됐습니다. 내가 왜 점점 피곤하고 회복이 더딘지, 왜 예전 같지 않은지를 자책이 아니라 생물학적 팩트로 이해하게 되는 순간, 조금 다르게 살 수 있게 됩니다. 원인을 알면 겁이 줄어드니까요.
인간답게 산다는 것, 바보처럼 행복하기
시지프스는 신의 벌을 받아 돌을 산 위로 굴려 올립니다. 돌은 정상에 닿기 직전 다시 굴러 내려오고, 그 행위를 영원히 반복합니다. 카뮈는 "우리는 시지프스가 행복했다고 상상해야 한다"라고 썼습니다.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처음엔 그 문장이 냉소적으로 들렸습니다. 그냥 체념하고 살라는 소리 아닌가 싶었거든요.
그런데 아이를 키우면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어제와 똑같이 밥을 먹이고, 같은 그림책을 읽어주고, 잠이 들 때까지 등을 두드려줍니다. 반복입니다. 생산성도 없고, 이력서에 쓸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아이가 자다가 이름을 부를 때, 그 순간만큼은 우주 어디에도 없을 법한 의미가 여기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제가 그 의미를 만든 겁니다. 누가 준 게 아니라.
'영혼 불멸 프로젝트(immortality project)'라는 심리학 개념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의 흔적을 영속시키려는 무의식적 충동을 뜻합니다. 위대한 업적을 남기려 하거나, 이름을 역사에 새기려 하거나, 종교를 통해 영생을 믿는 것이 모두 여기에 해당합니다. 물리학적으로는 전부 헛짓에 가깝습니다. 원자는 결국 흩어집니다. 하지만 그 믿음 덕분에 사람들이 오늘을 살아냅니다. 제 경험상, 그게 꼭 나쁜 일은 아닙니다.
차 한 잔의 온기에서 위로를 얻는 것, 아이의 웃음에 마음이 녹아내리는 것, 이것들은 우주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소중합니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는데 저 혼자 거기서 의미를 꺼냈으니까요.
자주 묻는 질문
Q. 죽음을 자꾸 생각하면 오히려 더 불안해지지 않나요?
A. 저도 처음엔 그랬습니다. 그런데 직접 겪어보니, 죽음을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물리적 상태'로 재정의하면 오히려 마음이 가벼워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죽음을 이상한 사건이 아니라 우주의 기본값으로 이해하면, 살아 있는 지금이 오히려 기적처럼 보이기 시작합니다.
Q. 삶에 객관적인 의미가 없다면, 어떻게 동기부여를 할 수 있을까요?
A. 의미가 주어지는 게 아니라 만드는 것이라는 사실이 오히려 자유를 줍니다. 타인이 정해준 기준으로 평가받을 필요가 없어집니다. 제 경우엔 아이와 함께하는 평범한 하루에서 직접 의미를 꺼냈고, 그게 어떤 외부 목표보다 오래가더군요.
Q. 노화를 늦추려는 노력이 의미 있는 건가요, 헛수고인가요?
A. 인간의 몸은 진화적으로 30~40년 수명에 맞춰 설계된 탓에, 그 이후부터는 필연적으로 여러 고장이 쌓입니다. 노화를 완전히 막는 것은 현재 과학으로는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건강한 상태를 더 오래 유지하려는 노력은, 더 많은 의미를 만들어낼 시간을 버는 일이라는 점에서 충분히 가치 있다고 봅니다.
Q. 종교가 없어도 죽음의 공포를 극복할 수 있을까요?
A.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종교는 영혼 불멸의 약속을 통해 공포를 다스리지만, 그것과 별개로 자신만의 의미 체계를 구축하는 방식도 작동합니다. 물리학적 세계관, 가족, 창작, 자연과의 연결감 같은 것들이 종교 없이도 죽음의 공포를 완충해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제 경험에서도 느꼈습니다.
결론
우주는 처음부터 아무 의미 없이 법칙에 따라 움직입니다. 좋고 나쁨도, 사랑스럽고 외로움도 우주가 알아주는 개념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거기에 자꾸 의미를 붙입니다. 바보처럼, 혼자 웃으면서. 제 경험상 그게 창피한 일이 아닙니다. 그게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용감한 일입니다.
오늘 아이가 잠들기 전에 손을 꼭 잡았습니다. 우주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을 순간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기억을 제가 직접 기록해두려 합니다. 삶의 허무를 이기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결국 지금 이 순간에 내가 만든 작은 의미를 하나씩 쌓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