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카테고리 없음

인생책 추천 (안내서, 내면 언어, 예술의 의미)

팝콘과 필름 2026. 9. 3. 10:56

목차


    전업 육아를 시작한 첫 해, 저는 아이가 울 때마다 '내가 뭘 잘못하고 있는 걸까'라는 생각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했습니다. 매뉴얼 같은 건 없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 일이었으니까요. 그때 우연히 접한 뇌과학자 김대식 교수의 책 이야기가 그 답답함에 이름을 붙여줬습니다. 인생은 '안내서 없이 시작하는 여행'이라는 말 한 마디가 이상하게 위로가 됐거든요.

     

    인생책 추천 (안내서, 내면 언어, 예술의 의미)
    인생책 추천 (안내서, 내면 언어, 예술의 의미)

    안내서 없이 던져진 삶, 히치하이킹처럼 시작된 육아

    더글라스 애덤스의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는 지구가 우주 고속도로 공사 명목으로 허무하게 파괴되면서 시작됩니다. 예고는 있었습니다. 다만 지구인들이 그 공고를 알아볼 방법이 없었을 뿐이었죠. 살아남은 지구인 한 명은 외계인 친구 덕분에 우주를 떠돌게 되고, 그 여정에서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찾아다닙니다.

    제가 이 이야기에서 멈칫한 부분은 따로 있었습니다. 소설 속에서 지구는 단순한 행성이 아닙니다. 삶의 의미라는 답(42라는 숫자)은 이미 정해져 있는데, 그 답에 맞는 '질문'을 찾아내기 위해 설계된 거대한 컴퓨터 시스템이 바로 지구라는 설정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삶, 사랑하고 일하고 늙어가는 그 모든 과정이 계산의 한 단계라는 거죠.

    저도 육아를 시작하면서 정답을 먼저 찾으려 했습니다. '안정형 애착(Secure Attachment)'이라는 개념을 붙들고 책을 뒤졌습니다. 여기서 안정형 애착이란, 아이가 양육자를 안전 기지로 인식하고 세상을 탐색할 수 있도록 형성되는 심리적 유대감을 말합니다. 이론은 알겠는데, 실제 육아 현장에서 그게 어떤 표정으로 나타나야 하는지는 아무도 안 가르쳐줬습니다. 정작 '질문'을 모르는 상태에서 답부터 외우고 있었던 셈이었습니다.

    결국 제가 택한 방법은 카메라였습니다. 틱톡에 아이와의 일상을 올리기 시작하면서 제삼자 시각으로 저 자신을 관찰했습니다. 처음에는 성장 기록용이었는데, 영상 속 제 표정이나 말투를 보면서 '아, 나 지금 많이 지쳐 있었구나'를 알아챈 날도 있었습니다. 히치하이킹처럼,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일단 올라탄 덕분에 보이기 시작한 것들이었습니다.

    • 소설 속 지구의 역할: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찾는 거대한 계산 장치
    • 답(42)은 이미 있지만, 질문이 정확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역설
    • 원래 라디오 쇼로 시작해 BBC 드라마로도 제작된 작품 (출처: BBC 공식 페이지)
    • 제목 네 단어 중 김대식 교수가 방점을 찍은 단어는 '안내서' — 인생은 안내서 없이 시작하는 여행이기 때문
    요약: 삶의 '답'보다 '질문'을 찾는 과정 자체가 삶이라는 것, 안내서 없이 던져진 육아에서 저도 그 방식으로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내면의 언어, 우리는 같은 단어로 다른 세계를 말한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는 아일랜드 더블린에 사는 평범한 남자 레오폴드 블룸의 하루를 천 페이지 넘게 담은 소설입니다. 그런데 그 하루 동안 드라마틱한 사건은 거의 없습니다. 문을 열고, 길을 걷고, 사람을 만나는 것뿐입니다. 분량의 대부분은 그 동작 사이사이에 쉴 새 없이 흐르는 레오폴드의 잡생각들입니다.

    이 기법을 '의식의 흐름(Stream of Consciousness)'이라고 합니다. 쉽게 말해, 머릿속에서 무질서하게 흘러 다니는 생각들을 검열 없이 그대로 문장으로 옮기는 서술 방식입니다. 문법도, 논리적 연결도 없습니다. 한 문장과 다음 문장이 이어지지 않는 건 그 사이에 전혀 다른 생각이 끼어들었기 때문입니다. 소설 마지막 스무 장 정도를 차지하는 몰리 블룸의 독백은 점과 쉼표조차 없는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문학사에서 인간의 내면을 가장 극단적으로 표현한 챕터로 꼽힙니다.

    김대식 교수는 이 소설을 수십 번 읽었다고 했습니다. 처음엔 이해가 안 돼서, 그다음엔 오기가 생겨서였다고요. 솔직히 이건 제가 예상하지 못한 독서 이유였습니다. '좋아서 여러 번 읽는다'는 건 익숙한 말인데, '이해 못 해서 여러 번 읽는다'는 건 완전히 다른 태도니까요.

    교수의 설명 중 제게 가장 오래 남은 부분은 언어의 해상도(Resolution)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여기서 해상도란, 생각이라는 고화질 이미지를 언어라는 제한된 픽셀로 압축할 때 얼마나 많은 정보가 손실되는지를 나타내는 비유입니다. '빨간 사과'라고 말하면 우리는 서로를 이해했다고 느끼지만, 실제로 두 사람의 머릿속 빨간 사과는 다른 기억과 다른 결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이나 '자유' 같은 단어는 더 심각합니다. 같은 단어를 쓰면서 완전히 다른 것을 약속하고, 나중에 배신이라고 오해합니다. 처음부터 다른 얘기를 하고 있었던 것인데요.

    제가 틱톡 영상을 통해 제 육아 방식을 다시 들여다봤을 때도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잘 돌보고 있다'는 제 인식과, 카메라에 찍힌 실제 제 표정 사이의 간극이 꽤 컸거든요. 제 안에서 선명하게 느껴지는 것들이 밖에서는 완전히 다르게 보일 수 있다는 걸, 영상이라는 외부 매개를 통해 처음으로 확인했습니다.

    요약: 언어의 해상도는 생각보다 훨씬 낮고, 그 간극이 오해와 단절의 근원이 됩니다. 율리시즈는 그 불일치를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낸 소설입니다.

     

    예술의 의미, 잔인한 세상에서도 그림을 그려야 하는가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은 제가 가장 오래 생각하게 된 책입니다. 터키 작가인 파묵은 이 소설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으며(출처: 노벨위원회), 배경은 16세기 오스만 제국 이스탄불입니다. 그런데 이야기의 핵심 질문은 놀랍도록 현대적입니다. "세상이 이렇게 잔인한데,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는 게 도덕적으로 허용되는가?"

    소설 속에는 몽골 군대의 바그다드 침략을 탑 위에서 목격한 한 화가가 등장합니다. 아래에서 가족과 친구들이 죽어가는데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자신의 눈을 스스로 찔러 실명합니다. 보지 않기 위해서요. 그리고 이후 아름다운 세계를 묘사하는 화가들을 살해하기 시작합니다. 잔인한 현실 앞에서 아름다움을 그리는 행위 자체가 죽은 자들에 대한 모욕이라는 논리였습니다.

    이 질문을 육아와 연결해보니 생각지 못한 지점이 열렸습니다. 저도 육아가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일상을 기록하는 게 괜찮은 건지 자주 의심했습니다. 지쳐 있으면서 웃는 영상을 찍는 게 어딘가 위선적인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파묵의 소설이 결국 도달하는 지점은 달랐습니다. 잔인함과 아름다움은 동시에 존재하고, 예술은 그 둘을 모두 담아낼 수 있을 때 진짜 의미를 가진다는 쪽에 가까웠습니다.

    김대식 교수가 이 책을 세 번이나 읽은 이유도 비슷한 맥락일 것 같습니다. 읽을 때마다 느낌이 달라진다고 했는데, 제가 보기에 그건 질문의 무게가 그만큼 깊기 때문입니다. '예술의 역할'이라는 개념, 즉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행위가 현실에서 어떤 기능을 하는가라는 질문은, 사람이 처한 상황에 따라 완전히 다른 답을 끌어냅니다. 제가 육아의 한복판에서 그 질문을 만난 것처럼요.

    요약: 예술은 현실을 회피하는 수단이 아니라, 잔인함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직면하는 방식입니다. 파묵은 그 긴장을 가장 치밀하게 쓴 작가 중 하나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어떤 순서로 읽어야 하나요?

    A. 원작은 총 다섯 권으로 이루어진 시리즈입니다. 국내에는 합본 형태로 출간되어 있어서 한 권으로 접할 수 있습니다. 처음 읽는다면 합본판으로 시작하되, 부담스럽다면 1권 분량인 앞 200페이지 정도만 읽어도 핵심 설정은 충분히 파악됩니다. SF보다는 철학적 블랙 코미디에 가까운 책이라 장르 선입견 없이 접하는 게 좋습니다.

     

    Q. 율리시즈는 너무 어렵다는데 꼭 처음부터 읽어야 하나요?

    A. 저도 처음부터 읽으라고 권하기 어렵습니다. 실제로 수십 번 읽은 전문가도 영화 먼저 보고 나서야 이해했다고 할 정도로 진입 장벽이 높습니다. 마지막 스무 장 정도인 몰리 블룸의 독백 챕터만 읽어도 이 소설이 왜 문학사에서 중요한지 느낄 수 있습니다. 점과 쉼표 없이 이어지는 그 문장들이 생각보다 강렬한 인상을 남깁니다.

     

    Q. 내 이름은 빨강은 역사 소설인가요, 추리 소설인가요?

    A. 두 가지 성격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오스만 제국 궁정의 세밀화 화가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살인 사건을 추적하는 구조입니다. 그 안에 예술의 윤리, 이슬람 문명과 유럽 문명의 충돌, 정체성의 문제가 층층이 쌓여 있습니다. 역사 배경이 낯설다면, 오히려 그 낯섦 자체를 입문의 이유로 삼아도 좋습니다.

     

    Q. 인생책을 여러 번 읽을 때 어떤 기준으로 다시 읽으면 좋을까요?

    A. 제가 직접 써봤는데, '10년에 한 번' 주기가 꽤 유효했습니다. 10대에 읽었을 때와 30대에 읽었을 때 같은 문장에서 다른 것이 걸립니다. 그 차이가 자신이 그 10년 동안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보여주는 거울 역할을 합니다. 억지로 다시 펼치기보다는, 살면서 어느 순간 '그 책이 생각난다'는 신호가 오면 그때 읽는 방법이 제 경험상 가장 잘 맞았습니다.

     

    결론

    세 권의 책을 하나로 묶는 실이 있다면, 저는 '정답보다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히치하이커는 삶의 질문을 찾는 과정이 곧 삶이라고 했고, 율리시즈는 우리가 같은 단어로 서로 다른 세계를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냈으며, 내 이름은 빨강은 잔인한 현실과 아름다움이 공존할 수 있는가를 끝까지 물었습니다.

    육아를 하면서 제가 배운 것도 결국 그 방향이었습니다. 완벽한 안내서를 기다리다가는 영영 시작할 수 없습니다. 서툰 채로 올라타고, 영상으로 자신을 들여다보고, 이해 안 되는 책을 몇 번이고 다시 펼치는 것, 그 과정이 곧 안내서가 되는 것 같습니다. 관심이 생겼다면 세 권 중 가장 얇고 진입이 쉬운 히치하이커부터 한 번 집어드시길 권합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Ttz5cuBDO-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