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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임마다 빠지지 않고 나가면서도, 정작 대표 자리만큼은 한 번도 맡고 싶지 않았다면 혹시 성격이 어중간한 것일까요? 저도 한동안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직접 겪어보니 그건 어중간함이 아니라, 아직 이름조차 없었던 '제3의 성향'이었습니다. 외향과 내향 사이 어딘가가 아니라, 완전히 다른 축에 서 있는 사람들. 인지심리학에서는 이를 '이향인(ambivert·앰비버트)'이라고 부릅니다.

행사 개근, 그런데 리더는 절대 사양 — 이게 중재자 성향이었습니다
친구가 그 질문을 던졌을 때, 저는 솔직히 할 말이 없었습니다. "너는 행사마다 개근하면서 왜 학생회는 절대 안 하냐?" 그 순간 제 머릿속에 처음 떠오른 단어는 '책임감 부족'이었습니다. 스스로도 반쯤 그렇게 믿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돌이켜보면 저는 무리의 중심에서 이끄는 역할보다, 한 발 빠져서 전체를 조망할 때 훨씬 더 선명하게 사고했습니다. 과열된 토론에서 양쪽 말을 다 들으며 수위를 낮추는 역할, 갈등이 번지기 전에 조용히 중간 지점을 제시하는 역할. 그게 제게 가장 자연스러운 자리였습니다.
인지심리학에서는 이런 성향을 '모더레이터(Moderator)'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모더레이터란 외향인과 내향인 사이에서 수위를 조절하고 두 기능이 충돌 없이 작동하도록 완충하는 역할을 의미합니다. 외향인이 '해결'에 강하고 내향인이 '집중과 분석'에 강하다면, 모더레이터는 그 두 힘이 서로를 소모하지 않도록 조율하는 사람입니다. 아담 그랜트 와튼스쿨 교수의 연구(출처: Wharton School, University of Pennsylvania)에서도 중간 성향의 사람들이 협상과 팀 성과에서 더 높은 효율을 보인다는 결과가 보고된 바 있습니다.
제가 직접 겪어보니, 이 역할을 수행할 때 느끼는 만족감은 리더로 나섰을 때와는 결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전자는 에너지를 충전받는 느낌이었고, 후자는 끊임없이 소모되는 느낌이었습니다.
- 외향인의 강점: 빠른 실행과 해결, 집단 에너지 결집
- 내향인의 강점: 깊은 집중, 냉철한 분석과 근본 원인 파악
- 이향인(모더레이터)의 강점: 두 성향 사이 수위 조절, 감정적 완충, 객관적 거리감 유지
'최적의 지점'을 찾으면 어중간함이 사라집니다
제 경험상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MBTI 검사에서 E와 I 사이를 수없이 오가며 "나는 어느 쪽인가"를 고민했는데, 그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외향과 내향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는 전제가 애초에 맞지 않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걸, 저는 꽤 늦게 알았습니다.
기질 심리학에서는 사람의 성향을 특징(trait) 기반으로 범주화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여기서 특징 기반 범주화란 '이 사람이 어떤 성격적 특성을 가지고 있는가'를 기준으로 외향·내향을 분류하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전체 인구의 20~30%가량은 역할(role) 기반으로 자신을 범주화하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즉 "나는 어떤 성향인가"가 아니라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맡아야 할 역할은 무엇인가"를 기준으로 행동을 결정합니다.
솔직히 이건 제 이야기입니다. 저는 공동체 행사에서 '구성원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것'은 자연스럽게 했지만, 그 이상의 역할을 굳이 자청하고 싶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반대로 무리에서 떨어져 혼자인 시간에 오히려 내면의 성장이 일어났습니다. 그게 게으름이 아니라 이향인 고유의 기질이었던 것입니다.
어중간하다는 말 대신 '최적의 지점'이라는 표현을 쓰는 순간, 그간의 찜찜함이 꽤 가볍게 풀렸습니다. 중요한 건 내가 어느 유형인가를 확정 짓는 것이 아니라, 어느 지점에서 제가 가장 잘 기능하는지를 파악하는 일이었습니다.
역할 기반 성향이 조직과 관계를 어떻게 바꾸는가
제가 직접 써봤는데, 이향인 성향을 인식하고 나서 가장 크게 달라진 것은 조직 안에서의 자기 위치 감각이었습니다. 회식에서 분위기를 맞추면서도 거기서 주도권을 쥐려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갈등이 생겼을 때 어느 편을 들지 않고 두 입장을 동시에 이해하는 것이 오히려 강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조직심리학에서는 이향인이 수행하는 역할을 '완충 기제(Buffer Mechanism)'라고도 표현합니다. 완충 기제란 집단 내 충돌하는 두 힘이 직접 맞부딪히지 않도록 중간에서 에너지를 흡수하고 재분배하는 기능을 의미합니다. 성격이 강한 외향인과 고집스러운 내향인이 충돌할 때, 그 사이에서 "이 방향도 일리 있고, 저 방향도 맞는 부분이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으면 집단은 쉽게 소모전으로 빠집니다.
실제로 출처: 미국심리학회(APA)에서 발표된 관련 연구들에 따르면, 조직 내 갈등 해결 과정에서 중간 성향의 구성원이 존재할 때 의사결정의 질과 팀 만족도가 유의미하게 높아지는 경향이 보고되었습니다.
개인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타인의 이야기를 끊지 않고 끝까지 들어주는 것, 상대가 답을 원하는 건지 공감을 원하는 건지를 먼저 파악하려는 것. 이런 태도가 제게는 기질적으로 자연스러운 일이었는데, 이향인의 특성이 공감 능력과 경청 능력으로 발현된다는 점과 정확히 맞닿아 있었습니다.
이분법적 언어, 즉 "넌 내 편이야, 남의 편이야?", "진보야 보수야?" 같은 양자택일 질문이 유독 불편하게 느껴진 이유도 이제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향인에게는 그 두 선택지가 모두 정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느 쪽도 아닌 영역에서 계속 버티게 만드는 것, 그게 이향인이 집단에 기여하는 방식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이향인이랑 그냥 양향인(ambivert) 이랑 같은 건가요?
A. 용어상으로는 앰비버트(ambivert)와 유사하게 쓰이지만, 개념의 결이 조금 다릅니다. 앰비버트가 외향과 내향의 중간 지점을 뜻한다면, 이향인은 외향도 내향도 아닌 제3의 별도 기질로 보는 시각에 가깝습니다. 제가 직접 겪어보니, '중간'이라는 표현보다 '다른 축'이라는 표현이 훨씬 정확하게 느껴졌습니다.
Q. 이향인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나요?
A. 모임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면서도 대표나 회장 같은 역할은 자연스럽게 사양하게 된다면, 이향인 성향을 가졌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혼자인 시간에 공허하거나 외롭다기보다는 오히려 생각이 정리되고 에너지가 회복된다는 느낌도 하나의 단서입니다. 이분법적 질문("어느 편이야?")이 유독 불편하게 느껴진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Q. 이향인도 리더가 될 수 있나요?
A. 물론입니다. 다만 이향인에게 맞는 리더십의 형태는 전면에서 이끄는 방식보다 참모형, 조율형에 가까운 경우가 많습니다. 조직심리학 연구에서도 뛰어난 조직의 성공 뒤에는 강한 스태프(staff) 조직이 있다는 점이 반복적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세크리터리(secretary), 즉 최종 결정권자 바로 직전에서 조율하는 역할이 이향인에게는 오히려 최적의 지점이 될 수 있습니다.
Q. 이향인은 직장 생활에서 어떤 부분이 가장 힘든가요?
A. 조직의 가치만을 위해 일하도록 강요받는 상황이 가장 버겁습니다.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것과 조직의 문화에 완전히 동화되는 것은 이향인에게 전혀 다른 일입니다. 또한 "넌 왜 행사는 참여하면서 회장은 안 하냐"는 식의 이분법적 기대가 반복될 때 심리적으로 지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제 경험상, 이 불편함의 정체를 '이향인'이라는 언어로 이해하고 나면 꽤 많은 것이 가볍게 풀립니다.
결론
치열한 외향·내향 이분법 속에서 오랫동안 어중간하다고 느꼈던 것들이, 이향인이라는 개념 하나로 꽤 많이 정리됐습니다. 저는 우유부단했던 것도 아니고, 책임감이 부족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무리의 중심보다 한 발 뒤에서 전체를 바라보는 것이, 제가 가장 잘 기능하는 최적의 지점이었을 뿐입니다.
이향인의 가치는 화려하지 않습니다. 전면에 나서지 않고, 공을 차지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집단이 극단으로 치닫지 않게 잡아주고, 서로 다른 성향의 사람들이 함께 성과를 낼 수 있도록 완충하는 역할은 조용하지만 필수적입니다. 자신이 이향인이라고 느껴진다면, 어중간하다는 말 대신 '모더레이터'라는 단어를 한번 써보시길 권합니다. 그 이름이 꽤 잘 맞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