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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처음엔 그냥 좀 피곤한 건줄 알았습니다. 아이를 돌보면서 밀려드는 무기력함과 막막함이 쌓여가는데도, '육아가 다 이렇지 뭐' 하고 넘겼거든요. 그런데 한 달을 돌아봤을 때 기분 좋았던 날이 단 하루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을 때,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왔습니다. 그게 경미한 우울증이라는 신호였다는 걸 한참 뒤에야 알았습니다.

경미한 우울증 — '그냥 원래 그런 거지'라고 넘겼던 이유
정신건강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이런 상태를 기분저하증(dysthymia)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기분저하증이란 주요 우울증처럼 극단적이지는 않지만, 낮은 기분이 만성적으로 지속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문제는 이게 너무 조용히 온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 미열이 계속되는데 아프다고 느끼지 못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낙도 없고 재미도 없는 게 인생이지'라는 말이 입에 붙어 있었고,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정신건강 전문의들의 이야기를 접했을 때, 한 달 내내 기분 좋은 날이 한 번도 없다면 그건 정상이 아니라는 말이 머리를 때렸습니다. 정상적인 사람도 80%는 그냥 무덤덤한 날이지만, 한 달에 한두 번은 '아, 오늘 기분 좋네' 하는 날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우울증은 불안과 달리 몸으로 확 느껴지지 않습니다. 불안은 심장이 두근거리거나 손이 떨리는 등 신체 증상이 분명하지만, 우울증은 그냥 무기력하고 재미없고 '인생 사는 거지 뭐' 하는 식으로 스며듭니다. 그래서 본인이 우울증인지 모르는 경우가 꽤 많다고 합니다. 저 역시 스스로를 '그냥 좀 지친 사람'으로 분류했을 뿐, 마음이 아프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니까요.
- 한 달 내내 기분 좋은 날이 없다면 경미한 우울 신호일 수 있습니다
- 우울증은 불안과 달리 신체 증상이 뚜렷하지 않아 본인이 인식하기 어렵습니다
- 무기력함을 '원래 그런 거지'로 넘기는 패턴이 가장 위험한 방치입니다
치유 — 의사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정신건강 분야에는 치료(treatment)와 치유(healing)를 구분해서 쓰는 시각이 있습니다. 치료는 의사가 일방적으로 하는 것이지만, 치유는 옆에서 들어주고 공감해 주는 사람과 함께 스스로 에너지를 내는 과정이라는 겁니다.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그게 그거 아닌가' 싶었는데, 직접 경험해 보니 확실히 다릅니다.
육아 번아웃이 심했던 어느 날, 저는 그냥 누군가한테 털어놓고 싶었습니다. 해결책이 필요한 게 아니라 그냥 들어주는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말을 꺼내고 나서 '맞아, 힘들었겠다'는 한마디를 들었을 때, 뭔가 속에서 빠져나가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그게 카타르시스(catharsis)라는 건데, 쉽게 말해 억눌린 감정이 표출되면서 심리적 긴장이 해소되는 현상입니다.
사이코드라마(psychodrama)라는 치료 기법도 비슷한 원리입니다. 사이코드라마란 연극 형식으로 감정을 직접 몸으로 표현하며 심리를 치유하는 방법인데, 실제 대상이 없어도 대역을 세워놓고 직접 표현하는 것만으로 화병 치료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가짜 상황이라도 감정에 몰입하면 몸이 진짜로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출처: Australian and Aotearoa New Zealand Psychodrama Association
저는 그때 사이코드라마까지 할 상황은 아니었지만, 그 원리만큼은 분명히 이해했습니다. 해결이 안 되더라도 표현하는 것 자체가 치유라는 것. 그리고 그 표현을 받아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생각보다 훨씬 큰 힘이 된다는 것.
회복탄력성 — 타고나는 게 아니라 기르는 겁니다
똑같이 힘든 상황인데 어떤 사람은 금방 털고 일어나고, 어떤 사람은 오래 힘들어합니다. 이걸 개인 차이로 봐야 하는지 의지의 문제로 봐야 하는지, 저는 꽤 오래 헷갈렸습니다.
정신건강 전문가들은 이를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기질적인 요인과 인지적인 요인입니다. 기질적 요인은 타고난 성향으로, 멜랑꼴리(melancholy)한 기질, 즉 감수성이 예민하고 우울한 정서를 타고난 경향을 말합니다. 인지적 요인은 같은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입니다. 물이 반 남았을 때 '반이나 있네'로 보느냐, '반밖에 없네'로 보느냐의 차이입니다.
여기서 회복탄력성(resilience)이라는 개념이 중요합니다. 회복탄력성이란 스트레스나 역경을 겪은 후 원래 상태로 돌아오거나 더 강해지는 심리적 능력을 말합니다. 출처: 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 이 능력은 타고나는 부분도 있지만, 훈련으로 기를 수 있다는 게 핵심입니다.
제가 시도해서 실제로 효과를 느낀 건 '걱정을 고체로 만드는' 연습이었습니다. 그 자리에서만 걱정하고, 자리를 뜨면 그 걱정을 두고 간다는 이미지 트레이닝입니다. 처음엔 의도적으로 해야 했지만, 반복하다 보니 집에 육아 스트레스를 그대로 끌고 오는 일이 줄었습니다. 인지적 훈련이 기질적 경향을 어느 정도 보완할 수 있다는 걸, 제 경험상 이건 분명히 효과가 있었습니다.
'갇혀 있다'는 감각도 회복탄력성과 연결됩니다. 같은 공간, 같은 역할에만 머물다 보면 사고방식도 굳어집니다. 새로운 공간을 찾아가는 것, 예를 들어 하고 싶었던 공부를 등록하거나 낯선 사람들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삶의 각도가 조금 달라집니다. 거창하게 탈출하는 게 아니라, 주렁주렁 매달린 짐을 들고 그냥 새로운 곳에 한 발 내딛는 것으로도 충분합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한 달에 기분 좋은 날이 거의 없는데 우울증인가요?
A. 무조건 우울증이라고 단정짓기는 어렵지만, 경미한 우울 상태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정신건강 전문가들은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기분 좋은 날이 있는 게 정상이라고 봅니다. 저도 처음엔 그냥 피곤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 기준으로 돌아보니 뭔가 다르다는 걸 인식하게 됐습니다. 전문의 상담을 받아보는 게 가장 정확합니다.
Q. 정신건강의학과 가기 전에 혼자 할 수 있는 게 있나요?
A. 공간을 바꿔보는 것과 감정을 표현하는 것, 두 가지가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냥 아는 사람에게 털어놓는 것도 치유 효과가 있다는 시각이 있는데, 제 경험상도 그냥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가 생각보다 큰 힘이 됐습니다. 다만 증상이 일상을 방해하는 수준이라면 전문 도움을 받는 게 맞습니다.
Q. 스트레스에 유독 약한 사람은 의지가 부족한 건가요?
A. 의지의 문제라고 보는 시각도 있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질적으로 예민한 경향이 있는 사람은 실제로 스트레스 자극에 더 크게 반응하도록 설계돼 있고, 이건 타고난 부분이 있습니다. 다만 인지적 훈련을 통해 반응 방식을 조금씩 바꿀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입니다.
Q. 육아 번아웃과 우울증은 다른 건가요?
A. 번아웃(burnout)은 과도한 역할 수행으로 인한 소진 상태이고, 우울증은 뇌의 신경화학적 변화와 연관된 상태라는 점에서 다릅니다. 그런데 육아 번아웃이 장기화되면 경미한 우울증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 경우도 그 경계가 모호했고, 두 가지가 함께 있었습니다. 구분보다는 '내가 지금 힘들다'는 신호를 무시하지 않는 게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결론
마음의 병은 특별한 사람만 걸리는 게 아닙니다. 정신건강 전문가들은 불안이나 우울이 있냐 없냐의 질적인 문제가 아니라, 어느 정도냐의 양적인 문제라고 말합니다. 저도 그 말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환자이고, 다만 그게 드러나거나 드러나지 않을 뿐입니다.
가장 먼저 할 수 있는 건 작은 신호를 무시하지 않는 겁니다. '한 달에 기분 좋은 날이 있었나'부터 돌아보고, 감정을 표현할 공간을 하나 만드는 것, 그리고 필요하다면 정신건강의학과의 문턱이 많이 낮아진 지금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 그 순서로 가면 됩니다. 몸살이 나면 병원에 가듯, 마음이 신호를 보낼 때 그냥 넘기지 않는 것이 회복의 시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