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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저는 오랫동안 삶이 공허하게 느껴지는 것이 제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열심히 살고 있는데 왜 이렇게 허전하지, 하고 스스로를 다그쳤던 거죠. 그런데 어느 날 홀로 떠난 소도시 여행에서 길을 잃고 들어간 허름한 식당의 국밥 한 그릇에 묘하게 마음이 풀렸고, 그때 처음으로 '어쩌면 이 공허함이 내 잘못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삶의 기본값이 공허하다는 것, 그리고 그 빈 공간을 억지로 채우려 할수록 더 힘들어진다는 것을 그 식당에서 어렴풋이 배웠습니다.

삶의 기본값: 공허함은 내 잘못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공허함이나 허무감은 삶에 문제가 생겼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집니다. 뭔가 부족해서, 혹은 내가 잘못 살아서 생기는 감정이라는 거죠. 저도 한때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공허함이 찾아올 때마다 스펙을 더 쌓거나, 더 바쁘게 움직이거나, SNS에서 타인의 화려한 일상과 제 삶을 비교하며 자책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직접 겪어보니, 이 전략은 오히려 역효과였습니다. 무언가를 달성할 때마다 그 기쁨은 며칠을 못 가고, 또 다른 비어있는 자리가 생겼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쾌락 적응(hedonic adaptation)'이라고 부릅니다. 쾌락 적응이란 좋은 일이 생겨도 시간이 지나면 행복 수준이 원래 상태로 돌아오는 현상을 말하는데, 쉽게 말해 아무리 좋은 일이 생겨도 뇌는 금방 그것을 '기본'으로 인식해 버린다는 뜻입니다.
출처: 미국 국립보건원(NIH) 연구 자료에 따르면 인간은 극단적인 긍정적·부정적 사건을 겪은 후에도 행복 수준이 일정 기준점으로 수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달성하고 나서 채워지지 않는 그 감각이 제 개인의 결함이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인 특성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하는 순간, 오히려 마음이 가벼워졌습니다. 공허함을 없애야 할 적으로 볼 게 아니라, 그냥 삶의 기본 배경음으로 받아들이는 것. 그 태도 하나가 꽤 많은 것을 바꿔놓았습니다.
100점 강박: 스스로 불행을 짓는 구조
한국 사회에서 자라며 저는 자연스럽게 '100점 인생'을 목표로 설정했습니다. 좋은 학교, 안정적인 직장, 남들에게 인정받는 커리어.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순간은 곧 실패처럼 느껴졌습니다. 90점을 받아도 놓친 10점이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구조였죠.
제 경험상 이건 단순한 성격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인지심리학에서 말하는 '결핍 편향(negativity bias)'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결핍 편향이란 긍정적인 경험보다 부정적인 경험, 즉 무언가가 없거나 부족한 상황에 뇌가 훨씬 강하게 반응하는 특성입니다. 진화적으로 생존을 위해 위협에 민감하게 반응해온 결과이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오히려 스스로 불행을 생산하는 회로가 되어버립니다.
출처: 미국심리학회(APA)는 결핍 편향이 불안, 반추적 사고, 낮은 자존감과 밀접하게 연관된다고 설명합니다. 저도 한때 이 회로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겉으로는 성취를 쌓으면서도 속으로는 끊임없이 불안에 시달리는 이중 생활을 했습니다.
변화는 시각을 바꾸면서 시작됐습니다. 삶의 점수를 100점 기준으로 계산하는 대신, 0점에서 출발해 내가 얻은 것들을 5점, 10점씩 더해가는 방식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길을 잃고 들어간 식당의 국밥 한 그릇이 5점을 채워줬고, 낯선 골목에서 우연히 마주친 풍경이 또 3점을 얹어줬습니다. 이렇게 쌓아가면 70점도 충분히 풍요로운 삶이 됩니다.
- 100점 강박의 핵심 문제: 달성해도 만족이 오래가지 않는 쾌락 적응
- 결핍 편향으로 인해 있는 것보다 없는 것에 더 강하게 집중하게 됨
- 시각 전환: 100점 기준의 감산법 → 0점에서 출발하는 가산법
- 작은 우연한 기쁨들이 실제로 삶의 밀도를 높여준다는 것을 직접 확인함
여행 치유: 리스크 테이킹이 주는 자기 효능감
여행이 좋다는 말은 너무 많이 들어서 진부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여행은 일상 탈출, 힐링, 재충전의 수단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실제로 경험해보니, 여행의 치유력은 '멋진 곳을 방문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낯선 상황에서 스스로 선택하고 감당하는 경험에서 나오는 것 같습니다.
특히 여행에서 일부러 검증되지 않은 식당을 찾아 들어가는 것처럼, 작은 리스크 테이킹(risk-taking)을 시도할 때 그 효과가 두드러집니다. 리스크 테이킹이란 결과가 불확실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판단으로 행동하는 것을 말하는데, 여행 맥락에서는 가이드 추천을 따르는 대신 직접 골목을 탐색하거나, 아무도 줄 서지 않는 허름한 가게 문을 여는 행동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제가 직접 써봤는데, 이런 작은 도전이 성공했을 때의 만족감은 화려한 관광지를 방문했을 때보다 훨씬 오래 갑니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자기 효능감(self-efficacy)'이 강화되는 경험이라고 설명합니다. 자기 효능감이란 '나는 할 수 있다'는 내적 확신으로, 이것이 쌓이면 일상의 불안과 공허감을 견디는 내성도 함께 올라갑니다.
반대로 SNS 핫플레이스 인증샷을 위한 여행, 빽빽하게 짜인 일정을 소화하는 여행은 제 경험상 오히려 더 지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여행조차 100점을 내야 하는 과제가 되어버리면, 그것도 또 다른 강박이 됩니다. 포르투갈의 후미진 골목 식당에서 생소한 대구 요리를 먹고 파두(Fado) 공연을 우연히 마주친 경험처럼, 계획에 없던 발견이 오히려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장면이 되는 것입니다. 파두란 포르투갈 특유의 전통 음악 장르로, 슬픔과 그리움이 뒤섞인 독특한 정서를 음향 장비 없이 날 것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열심히 사는데 왜 공허함이 사라지지 않나요?
A. 일반적으로 공허함은 노력이 부족해서 생긴다고 알려져 있지만, 제 경험상 오히려 너무 바쁘게 살수록 공허감이 더 강하게 치고 올라오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는 쾌락 적응이라는 심리 현상 때문으로, 달성 직후의 만족은 금방 기준점으로 흡수되어버립니다. 공허함을 없애려 채우기보다, 삶의 기본값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역설적으로 더 편안한 출발점이 됩니다.
Q. 여행을 가도 왜 금방 일상이 똑같이 느껴질까요?
A. 빽빽하게 짜인 일정을 소화하는 여행은 또 다른 과제 수행처럼 느껴져 오히려 지치기 쉽습니다. 제가 직접 비교해봤을 때, 계획에 없던 골목 식당을 혼자 찾아가거나 낯선 공연을 우연히 마주치는 작은 리스크 테이킹의 경험이 훨씬 오래 마음에 남았습니다. 결과의 불확실성을 감수하는 그 순간이 자기 효능감을 자극하기 때문입니다.
Q. 혼자 있는 시간이 외로움을 더 키우지 않나요?
A. 혼자 있는 것이 곧 외로움이라는 인식이 있는데, 심리학에서는 자발적으로 선택한 독처와 원치 않는 고독감을 명확히 구분합니다. 제 경험상 스마트폰 없이 20~30분 혼자 걷는 시간은 외로움보다 오히려 머릿속이 정리되는 느낌을 줬습니다. 이 독처의 시간이 쌓이면 자기 자신과의 관계가 편안해지고, 타인과의 관계도 덜 소진되는 방향으로 변화했습니다.
Q. 100점 강박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A. 강박을 의지로 없애려는 시도는 대부분 실패로 끝났습니다. 제 경우엔 계산 방식 자체를 바꾸는 것이 효과적이었습니다. 100점에서 얼마나 부족한지를 보는 감산법 대신, 오늘 얻은 작은 것들을 0에서 더해가는 가산법으로 하루를 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국밥 한 그릇의 따뜻함이 5점, 잠깐 들른 서점에서 마음에 든 문장 하나가 3점처럼요. 이것이 쌓이면 70점짜리 하루도 충분히 풍요롭게 느껴집니다.
결론
정리하면, 공허함은 없애야 할 문제가 아니라 삶의 출발선입니다. 저는 그것을 결함으로 여기고 억지로 메우려 했던 시간이 길었는데, 그 시간이 오히려 불안과 강박을 키웠습니다. 기본값이 공허라는 사실을 인정했을 때 비로소 작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화려한 100점짜리 삶이 아니어도 됩니다. 낯선 식당에서 예상 밖으로 맛있는 음식을 찾아내는 5점짜리 기쁨, 혼자 걷는 골목에서 잠깐 머릿속이 조용해지는 3점짜리 고요함. 그런 것들이 차곡차곡 쌓여 70점짜리 삶을 만들고, 그 70점이 사실 충분히 살 만한 삶이라는 것을 제가 직접 경험으로 확인했습니다. 지금 당장 먼 곳으로 떠나지 않아도 됩니다. 오늘 오후, 익숙한 길 대신 낯선 골목 한 블록을 더 걸어보는 것부터 시작하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