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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우연성 (깊이 있는 사람, 번아웃, 계획된 삶)

팝콘과 필름 2026. 8. 22. 09:35

목차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제가 아이 재우고 새벽에 올린 B급 영상 하나가 정성껏 만든 기획 영상을 조회수로 가뿐히 눌러버렸을 때, 처음엔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런데 그 '예상 못 한 기쁨'이 제 삶을 살아있게 만들고 있었다는 걸, 인지심리학자 김경일 교수의 이야기를 들으며 비로소 언어로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삶의 우연성 (깊이 있는 사람, 번아웃, 계획된 삶)
    삶의 우연성 (깊이 있는 사람, 번아웃, 계획된 삶)

    깊이 있는 사람은 '자주' 고민한다는 것

    육아를 하면서 제 주변의 어른들을 다시 보게 됐습니다. 아이가 생기면 갑자기 인생 조언을 해주는 분들이 늘어나는데, 그분들 중엔 두 부류가 있었습니다. "그건 이렇게 하면 돼, 원래 다 그래"라고 단번에 결론을 내리는 분과, "나는 그때 이렇게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좀 달리 했을 것 같기도 해"라고 고민을 얹어서 말씀하시는 분.

    인지심리학(cognitive psychology), 즉 인간이 세상을 지각하고 판단하는 방식을 연구하는 학문의 관점에서 보면, 후자가 훨씬 깊이 있는 사람입니다. 핵심은 고민의 크기가 아니라 빈도입니다. 같은 주제를 한 달 전에도, 일주일 전에도, 어제도 고민해 온 사람은 상황이 달라질 때마다 그 고민이 업데이트됩니다. 그렇게 맨 마지막에 남는 것이 진짜 철학이 됩니다.

    행복 연구에서도 비슷한 결론이 나온 바 있습니다. 행복감을 결정하는 건 행복의 크기보다 빈도라는 것인데, 이 역시 자주 느끼는 작은 기쁨이 드물게 찾아오는 큰 기쁨보다 삶의 만족도를 더 높인다는 의미입니다(출처: 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 고민도, 행복도, 결국 '자주'가 핵심이라는 점이 제게는 꽤 묵직하게 다가왔습니다.

    반대로 한 번의 큰 인상으로 고정관념이 박히고 이후로 절대 수정하지 않는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오히려 깊이가 없어 보입니다. 신념(belief)이라는 단어 자체가 심리학에서 잘 쓰이지 않는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태도(attitude)가 여러 번 반복되어 굳어진 것이 신념인데, 태도는 생각보다 훨씬 쉽게 바뀝니다. 그러니 신념이 흔들릴 수 있다는 걸 경계하는 것 자체가, 오히려 더 나은 태도입니다.

    • 깊이 있는 사람의 특징: 같은 주제를 다른 시점에 반복해서 고민함
    • 신념보다 태도가 먼저: 태도는 바뀌기 쉽기에 신념도 경계가 필요함
    • 행동을 약속하는 것이 감정을 약속하는 것보다 실제로 지키기 쉬움
    요약: 사람의 깊이는 확신의 강도가 아니라 고민의 빈도에서 드러나며, 자주 흔들리고 수정하는 사람이 결국 더 단단한 철학을 갖게 됩니다.

     

    번아웃은 예외 없이 온다, 다만 타이밍이 다를 뿐

    제가 직접 경험해봤는데, 육아 번아웃(burnout)이 가장 무서운 이유는 '갑자기'라는 점이었습니다. 번아웃이란 신체적·정서적 자원이 고갈되어 무기력과 냉소가 찾아오는 소진 상태를 말합니다. 전날까지 괜찮았는데 어느 날 아침 아이 울음소리를 듣는 순간 눈물이 나더라고요. 그게 소진감이었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번아웃에 대한 민감도(sensitivity)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번아웃이 아예 오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출처: WHO, 번아웃 국제질병분류 등재). 번아웃에 예민한 사람은 멀리서도 신호를 감지하지만 과민 반응으로 일상이 흔들릴 수 있고, 둔한 사람은 목전에 와서야 깨닫기 때문에 한순간에 무너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느 쪽이 낫다고 단정할 수 없고, 각각의 위험이 다릅니다.

    제 경우엔 둔한 편이었습니다. '나는 아직 괜찮아'를 반복하다가 어느 날 영화를 보는데 눈물이 터졌는데 멈추지 않더라고요. 그게 오히려 회복의 신호였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됐습니다. 감정 표현을 억누르는 것, 즉 희로애락의 감정을 드러내지 못하게 하는 문화가 번아웃의 징후를 가리는 역할을 합니다. 한국 사회에서는 특히 아프거나 힘들다고 말하는 것이 '약함'이나 '무능'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있어서, 자기 소진 상태를 숨기는 것이 더 큰 위험을 키웁니다.

    번아웃이 오고 있는지 확인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울고 싶은 상황에서 실제로 눈물이 나는지 확인하는 것입니다. 감정의 출구가 막혀 있다면, 소진이 상당히 진행된 상태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요약: 번아웃은 누구에게나 오며, 예민함과 둔함은 우열이 아닌 각자의 위험 패턴일 뿐입니다. 감정 표현을 막지 않는 것이 가장 빠른 번아웃 감지법입니다.

     

    계획된 삶이 왜 이렇게 지루하고 숨막힐까

    제 틱톡 영상이 예상치 못하게 반응이 터진 날, 저는 꽤 오랜만에 두근거림을 느꼈습니다. 그전까지 제 하루는 기저귀 교환 횟수, 이유식 스케줄, 낮잠 타이밍이 촘촘하게 짜여 있었고, 그 스텝을 무사히 완수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안전하지만 설레지 않는 삶이었습니다.

    이 감각을 심리학에서는 우연성(randomness)의 부재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우연성이란 내가 통제하거나 예측할 수 없는 긍정적 사건이 삶에 끼어드는 빈도를 의미합니다. 심리학자 댄 길버트(Daniel Gilbert)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의 뇌는 끊임없이 5만 가지 이상의 미래 시점을 예상하려 하는데, 이 예상이 모두 맞아떨어지는 상황, 즉 모든 것이 예측 가능해지면 뇌는 '확인'만 할 뿐 더 이상 설레지 않습니다.

    월급이 들어오는 날이 왜 그렇게 기쁘지 않냐면, 정확히 언제인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월급일을 그 주 안에서 랜덤 하게 지급하는 실험에서 직원들이 월요일파, 수요일파, 금요일파로 나뉘어 기대감을 보였다는 연구 결과는, 우연성이 동기와 활력에 얼마나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한국 사회는 지금 이 우연성이 과도하게 줄어든 상태에 있습니다. 입시, 취업, 결혼, 내 집 마련까지 이어지는 촘촘한 인생 공식이 있고, 그 스텝을 따라가지 못하면 낙오된 것처럼 느끼는 구조입니다. 그 반작용으로 사람들이 주식, 코인, 사주, AI 운세처럼 통제 불가능한 우연성을 콘텐츠로 소비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제가 육아 브이로그의 예측 불가능한 조회수에서 활력을 얻은 것처럼, 인간은 어떤 방식으로든 삶에 우연성을 집어넣으려 한다는 걸 실감합니다.

    요약: 지나치게 계획된 삶은 뇌가 설레지 못하는 상태를 만들며, 일상 속 작은 우연성이 삶의 활력과 재미의 핵심 연료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깊이 있는 사람인지 어떻게 알아볼 수 있나요?

    A. 어떤 주제에 대해 "나 그 고민 자주 해"라고 말하는 사람이 신호입니다. 강한 확신보다 반복적인 고민이 진짜 철학을 만든다는 인지심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불확실성을 인정하면서도 꾸준히 생각해온 사람이 결국 더 단단한 시각을 갖게 됩니다. 즉각적인 결론을 내리는 사람보다 "이번엔 내가 좀 그랬나"라고 스스로를 점검할 수 있는 사람이 깊이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Q. 번아웃이 왔는지 스스로 어떻게 확인하나요?

    A. 가장 빠른 자가 확인법은 감정 표현이 되는지 점검하는 것입니다. 울고 싶은 상황인데 눈물이 나오지 않거나, 웃겨야 할 상황인데 웃음이 없다면 감정의 출구가 막힌 상태일 수 있습니다. WHO는 번아웃을 공식적으로 직업 관련 소진 현상으로 분류하고 있으며, 감정 둔화(emotional numbness)를 주요 징후 중 하나로 봅니다. 이 신호가 지속된다면 전문가 상담을 고려해보는 것이 좋습니다.

     

    Q. 사주나 AI 운세를 자꾸 보는 게 심리적으로 문제인가요?

    A. 그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삶이 지나치게 예측 가능해진 상태에서 우연성을 보충하려는 자연스러운 욕구로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가치와 확률이라는 두 가지를 끊임없이 알고 싶어하는데, 그 욕구가 운세 소비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다만 결과에 지나치게 의존하거나 일상 결정을 운세에 맡기기 시작한다면, 그건 다른 차원의 문제로 봐야 합니다.

     

    Q. 게임을 많이 한 뒤 바로 공부하면 왜 안 되나요?

    A. 게임을 할 때 뇌는 실제 노동과 거의 동일한 인지 자원을 소모합니다. 집중, 판단, 반응, 전략 수립 등 전두엽이 담당하는 실행 기능(executive function)이 게임 중에도 활발하게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게임이 끝난 직후 공부를 시작하는 건, 삽질을 네 시간 한 뒤 곧바로 곡괭이를 들라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충분한 휴식 후에 학습 효율이 훨씬 높아집니다.

     

    결론

    제가 이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가장 오래 남은 문장은 "작은 고민을 자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큰 깨달음이나 확고한 신념보다, 어제와 오늘 사이에 생각이 조금 달라지는 사람이 결국 깊이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 그리고 그 고민이 쌓여야 번아웃의 신호도, 삶의 우연성도, 자기 자신도 더 잘 읽을 수 있다는 것.

    완벽하게 짜인 하루보다 가끔 예상을 빗나가는 하루가 더 살아있는 느낌을 준다는 걸, 제 육아 브이로그의 B급 영상이 먼저 가르쳐줬습니다. 삶에서 우연성이 지나치게 제거된 느낌이 드신다면, 오늘 하루 딱 하나만 계획 밖으로 꺼내보는 것도 방법입니다. 그 작은 이탈이 생각보다 많은 것을 되살려줄 수 있습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bDD586i8F6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