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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100권 읽기 챌린지를 마친 날, 저는 허탈했습니다. 완독 목록은 늘었는데 막상 "그 책 어떤 내용이었어요?"라는 질문 앞에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많이 읽으면 저절로 생각도 깊어질 거라 믿었던 게 착각이었다는 걸 그때서야 알았습니다. 그 경험이 제 독서법을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독서법 다독의 함정 — 많이 읽을수록 좋다는 착각
일반적으로 독서량이 많을수록 지식도 비례해서 쌓인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저도 오랫동안 그렇게 믿었습니다. 월별 목표를 세우고 베스트셀러 목록을 훑으며 빠르게 완독 수를 채웠습니다. 그런데 제 경험상 이건 좀 달랐습니다.
완독 한 권수가 늘어날수록 오히려 기억에 남는 문장은 줄어들었습니다. 내용이 파편화(fragmentation)된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여기서 파편화란, 읽은 정보가 하나의 맥락으로 연결되지 않고 흩어진 조각으로만 남아 활용되지 못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수십 권을 읽었어도 정작 제 언어로 생각을 표현하려 하면 어휘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서울대학교 글쓰기 강의를 14년째 진행 중인 나미네 교수도 같은 문제를 지적합니다. 권수에 집착하는 독서보다 한 권을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읽는 것이 문해력 향상에 훨씬 효과적이라는 겁니다. 문해력(literacy)이란 단순히 글자를 읽는 능력이 아니라, 텍스트의 의미를 파악하고 자기 생각으로 재구성하는 능력 전반을 가리킵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다독이 문해력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꽤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 100권을 각 1회 읽는 것보다 1권을 반복해서 읽는 쪽이 어휘 체화에 유리합니다
- 빠른 다독은 지식의 파편화를 초래해 실제 표현력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 문해력 향상의 핵심은 텍스트를 자기 언어로 재구성하는 경험의 누적입니다
깊이 읽기 — 한 권을 몸으로 읽는 방법
방식을 바꾼 건 단순했습니다. 마음에 드는 책 한 권을 사서, 밑줄을 긋고, 그 문장을 노트에 손으로 옮겨 적었습니다. 필사(筆寫)라고 불리는 이 방법은 단순해 보이지만 효과는 달랐습니다. 여기서 필사란 책 속 문장을 그대로 따라 쓰는 행위로, 시각적 독서에 신체 운동을 결합해 어휘의 뉘앙스를 뇌에 훨씬 깊이 각인시키는 방법입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처음 읽을 때는 그냥 넘어갔던 단어들이 직접 손으로 쓰고 나면 갑자기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아릿하다'와 '아련하다'가 어떻게 다른지, '속상하다'와 '상심하다'가 어떤 감정의 결을 가리키는지 그 차이가 구체적으로 느껴졌습니다.
나미네 교수는 1998년부터 이 방식을 직접 실천해 왔다고 밝힙니다. 마음에 드는 문장을 발견하면 도서관 책이라도 별도 노트에 옮겨 적고, 그 단어들이 문맥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반복해서 확인했다고 합니다. 제가 직접 써봤는데, 이 방식이 가져오는 변화는 두 달 안에 체감할 수 있었습니다. 쓰고 싶은 말이 있는데 표현이 안 돼서 답답했던 순간들이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두 번째 독서에서는 밑줄 친 부분만 다시 읽습니다. 그리고 그 부분을 타이핑해서 A4 한 장으로 정리한 뒤, 그 요약본을 여러 번 반복해서 읽습니다. 이 과정을 거치면 세 번째 독서 때는 저자의 의도가 전혀 다르게 보입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독서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걸 이 방식을 통해 처음 실감했습니다.
어휘력 — 감정을 표현하는 재료가 늘어난다는 것
어휘력(vocabulary)이란 단순히 아는 단어의 개수를 뜻하지 않습니다. 어떤 상황과 감정에 어떤 단어를 선택할 수 있는지, 그 단어의 층위를 구분하는 감각까지를 포함합니다. 제 경험상 이 감각이 생기기 전과 후는 확연히 달랐습니다.
예전에는 뭔가 감정이 복잡할 때 "기분이 이상해요" 혹은 "좀 속상해요" 정도로만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깊이 읽기를 반복하며 어휘가 늘어나자, 같은 감정을 훨씬 세밀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됐습니다. '막막하다'와 '암담하다'가 다르고, '허탈하다'와 '공허하다'가 다른 결을 가진다는 걸 글에서 만나 체화하게 된 겁니다.
나미네 교수가 시집을 적극 추천하는 이유도 이와 맞닿아 있습니다. 시는 짧은 분량 안에 단어 하나하나의 밀도가 높고, 산문보다 훨씬 응축된 어휘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김소월 전집이나 정지용 전집처럼 고풍스러운 어휘가 가득한 시집은 요즘 일상에서 접하기 어려운 표현들을 자연스럽게 익히는 데 도움이 됩니다. '묘연하다(소식이 끊겨 알 길이 없다)'나 '무료히(심심하게)' 같은 단어가 바로 그런 예입니다.
출처: 국립국어원에 따르면 한국어 어휘 수는 약 110만 개에 달하지만 일반 성인이 실제로 사용하는 어휘는 2만~5만 개 수준에 그칩니다. 아는 단어의 범위가 곧 생각과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그릇의 크기가 된다는 점에서, 어휘력 확장은 단순한 교양이 아니라 소통의 기본 인프라입니다.
초심자를 위한 단계별 접근 — 완벽하지 않아도 됩니다
다만, 처음부터 필사와 반복 독서를 동시에 실천하려 하면 부담이 큽니다. 제가 직접 겪어봤습니다. 처음에는 너무 의욕적으로 시작했다가 이틀 만에 포기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경험 이후 깨달은 건, 깊이 읽기의 시작은 거창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마음에 와닿는 문장 한 줄만 수첩에 적어보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 한 문장을 왜 좋아했는지 두 줄 정도 써보는 습관이 쌓이면,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더 읽고 더 적고 싶어 집니다. 독서를 오래 유지하고 싶다면, 처음의 동력은 즐거움에서 와야 합니다.
나미네 교수는 이 부분에서 중요한 말을 합니다. 본인에게 맞지 않는 책을 억지로 읽을 필요는 없다는 겁니다. 어떤 책이 나한테 자꾸 안 들어온다면, 그 책의 서평을 먼저 읽거나, 번역본이라면 역자 후기부터 읽으며 맥락을 잡은 뒤 다시 시도해 볼 수 있습니다. 출처: 국립중앙도서관은 서평과 독서 가이드를 무료로 제공하고 있어 처음 책을 선택할 때 참고하기 좋습니다.
제 경우엔 책이 부담스럽게 느껴질 때 도서관에 그냥 앉아 있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책 냄새와 조용한 공간이 주는 분위기가 독서에 대한 심리적 장벽을 낮춰주는 데 생각보다 효과가 있었습니다. 혼자 읽는 게 지속이 어렵다면 북클럽이나 소모임에 참여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습관은 환경과 주변 사람에게서 전염됩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책을 많이 읽으면 어휘력이 자동으로 늘지 않나요?
A. 일반적으로 다독이 어휘력 향상에 효과적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제 경험상 단순히 권수를 늘리는 방식은 지식의 파편화로 이어지기 쉽습니다. 같은 책을 반복해서 읽으며 밑줄 친 표현을 직접 손으로 옮겨 적는 필사를 병행할 때 어휘가 실제 표현력으로 연결됐습니다.
Q. 시집을 읽으면 어휘력에 정말 도움이 되나요?
A. 시는 짧은 분량 안에 단어 하나하나의 밀도가 높아 어휘 체화에 유리한 장르입니다. 특히 김소월, 정지용 같은 시인의 작품은 현대 일상어에서 접하기 어려운 고풍스러운 표현들을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어서, 어휘력 확장을 목표로 한다면 좋은 출발점이 됩니다.
Q. 필사는 어떻게 시작하면 좋은가요?
A. 처음부터 긴 분량을 옮겨 적으려 하면 부담이 커서 중단하기 쉽습니다. 제가 처음에 그랬습니다. 마음에 드는 문장 한 줄을 수첩에 적고, 왜 이 문장이 좋았는지 두 줄 정도 써보는 것에서 시작하는 게 현실적입니다. 이 습관이 자리 잡히면 자연스럽게 분량이 늘어납니다.
Q. 어려운 책은 억지로 끝까지 읽어야 하나요?
A. 목적에 따라 달라집니다. 업무나 학업처럼 반드시 소화해야 하는 텍스트라면 어떻게든 읽어내야 하지만, 취미와 즐거움을 위한 독서라면 맞지 않는 책을 억지로 붙들 필요는 없습니다. 서평을 먼저 읽거나 역자 후기로 맥락을 파악한 뒤 재도전하는 방법이 유연하고 지속 가능한 방식입니다.
결론
저는 100권을 읽고도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경험 덕분에 독서법을 완전히 바꿨습니다. 그 이후 한 권을 천천히, 여러 번, 손으로 옮겨 적으며 읽는 방식이 실제 표현력과 어휘력을 키워준다는 걸 몸으로 확인했습니다. 다독이 나쁜 게 아니라, 깊이 없이 속도만 쫓는 독서가 문제였던 겁니다.
처음부터 거창하게 시작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늘 읽은 페이지에서 마음에 드는 문장 한 줄만 적어보는 것, 그게 깊이 읽기의 시작입니다. 그 한 줄이 쌓이면 언젠가 생각이 언어가 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