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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처음엔 나를 사랑하라는 말이 그저 SNS 감성 문구 정도라고 생각했습니다. 육아와 살림을 전담하면서 가족을 위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해냈는데, 정작 제 몸에 멍이 들어도 언제 생겼는지조차 몰랐던 날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완전한 번아웃을 겪고 나서야, 나를 사랑한다는 것이 거창한 다짐이 아니라 귀찮더라도 나에게 좋은 것을 해주는 작은 행동의 반복임을 실감했습니다.

번아웃은 예고 없이 오지 않았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저는 번아웃(burnout)이라는 게 어느 날 갑자기 쓰러지듯 찾아오는 줄 알았습니다. 여기서 번아웃이란 신체적·정서적 에너지가 완전히 고갈되어 일상적인 기능이 어려워지는 상태를 말합니다. 오랫동안 축적된 피로와 자기 방치가 임계점을 넘는 순간 터지는 것인데, 제 경우엔 그 신호들이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습니다.
아이를 재우고 나서 소파에 앉는 것조차 "이 시간에 뭔가를 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죄책감으로 채워졌고, 쉬면서도 쉬지 못하는 상태가 반복됐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자기인식(self-awareness) 부재의 전형적인 패턴으로 봅니다. 자기 인식이란 자신의 감정 상태, 신체 반응, 욕구를 실시간으로 알아차리는 능력을 말합니다. 우리 눈과 귀 같은 감각기관이 모두 외부 세계를 향해 있는 구조상, 자기 내부를 들여다보는 것은 의식적인 훈련 없이는 어렵습니다(출처: 미국심리학회(APA)).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일반적으로 번아웃은 일을 너무 많이 해서 생긴다고 알려져 있지만, 저는 일의 양보다 "내 마음을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은 시간"이 쌓인 것이 더 큰 원인이었습니다. 몸에 멍이 들어도 아픔을 느끼지 못하듯, 마음이 이미 한계에 달했는데도 그 신호를 외면한 채 달려온 것이었습니다.
- 번아웃 주요 신호: 만성 피로, 감정 무감각, 사소한 일에 대한 과민 반응
- 자기인식 부재: 신체 이상(멍, 베임)을 뒤늦게 알아차리는 패턴과 유사
- 원인: 일의 양보다 자기 내면을 방치한 시간의 누적
자기돌봄이라는 말의 실체
번아웃 이후 저는 자기 돌봄(self-care)이라는 개념을 다시 생각하게 됐습니다. 자기 돌봄이란 단순히 스파를 가거나 쉬는 것이 아니라, 귀찮고 번거롭더라도 자신에게 이롭다고 알면서 미뤄온 행동들을 의식적으로 실천하는 과정입니다. 제가 직접 해봤는데, 이게 처음엔 아주 어색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1시간 거리도 마다하지 않으면서, 정작 저 자신을 위해서는 집 앞 편의점 가기도 귀찮다고 넘겼던 때가 많았습니다. 아침에 물 한 잔, 샤워 후 바디로션 한 번. 좋은 줄은 알지만 늘 "이 정도야 뭐"라며 건너뛰던 것들입니다. 그런데 번아웃을 겪고 나서 이 사소한 행동들을 의식적으로 해주기 시작하자, 의외로 그게 나를 괜찮게 바라보는 태도와 연결된다는 걸 알았습니다.
또 하나, 저는 그동안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무조건적 긍정과 혼동했습니다. 내 단점을 억지로 장점으로 포장하거나, 지금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좋다고 우기는 게 아닙니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자기 수용(self-acceptance)이란 장점과 단점을 모두 포함한 전체로서의 나를 거부하지 않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단점을 보면서도 그 사람을 좋아하는 것처럼,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면서도 나를 밀어내지 않는 것이 출발점입니다(출처: 미국 국립정신건강연구소(NIMH)).
제 경험상, 자기돌봄은 거창할수록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매일 운동하겠다"는 다짐보다, "오늘 아침 물 한 잔"이 훨씬 더 오래 이어졌습니다.
휴식을 허락한다는 것
일반적으로 쉬는 것은 비생산적이고 나태한 것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제 경험상 이건 완전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번아웃으로 침대에서 한 발짝도 못 움직이던 날, 저는 처음으로 "내가 이렇게 될 때까지 왜 쉬지 않았을까"를 생각했습니다. 기름이 다 떨어진 차는 주유소에서 시동을 끄고 가만히 있어야 다시 달릴 수 있는데, 저는 그 당연한 이치를 제 몸에는 한 번도 적용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욕구 억압(impulse suppression) 개념이 여기에 정확히 들어맞습니다. 욕구 억압이란 특정 욕구나 충동을 의식적으로 눌러서 행동으로 표출하지 못하게 막는 과정인데, 억눌린 욕구는 반드시 어떤 형태로든 폭발합니다. 아무것도 하기 싫은 마음을 계속 미워하고 채찍질로 덮어버리면, 결국 진짜 해야 할 일조차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립니다. 저는 그것을 몸으로 직접 겪었습니다.
제가 직접 써봤는데, "걱정 시간 만들기"라는 방법이 꽤 도움이 됐습니다. 매일 저녁 정해진 15분 동안만 실컷 걱정하고, 그 외 시간에 걱정이 떠오르면 "그건 걱정 시간에 하는 것"이라고 미루는 연습입니다. 이를 능동적 지연 행동(active procrastination)이라고 하는데, 단순히 미루는 게 아니라 의지를 가지고 시점을 조율하는 것입니다. 이 훈련을 통해 걱정과 불안에 대한 통제감이 생기고, 그 여백이 진짜 휴식으로 채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흐린 눈 뜨기"도 저는 의식적으로 연습했습니다. 설거지가 쌓여 있어도 오늘 제 차례가 아니면 일부러 못 본 척하는 것, 직장에서 아무도 안 하려는 일이 보여도 바로 손 내밀지 않는 것. 이게 처음엔 엄청 불편했지만, 해보니 세상이 무너지지 않더라고요.
자주 묻는 질문
Q. 나를 사랑하는 게 뭔지 모르겠어요. 어떻게 시작하나요?
A. 일반적으로 나를 사랑하는 것을 긍정적 자아상이나 자신감 같은 감정 상태로 알고 있는 분들이 많은데, 제 경험상 그건 결과이지 출발점이 아니었습니다. 아침에 물 한 잔 챙겨 마시기, 샤워 후 바디로션 바르기처럼 좋은 줄 알면서 귀찮아서 안 하던 것을 억지로라도 나에게 해주는 것부터 시작하는 게 현실적입니다. 행동이 감정보다 먼저입니다.
Q. 쉬면 나태해질 것 같아서 불안한데 어떻게 하죠?
A. 휴식이 나태함이라는 인식은 생산성을 최고 가치로 보는 사회 분위기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편견에 가깝습니다. 연료가 다 떨어진 차가 주유소에서 멈춰 있어야 다시 달릴 수 있듯, 휴식은 다음 행동을 위한 에너지 충전 과정입니다. 제 경우엔 억지로 버티다 번아웃이 왔고, 오히려 그게 몇 주간 아무것도 못 하는 진짜 나태함으로 이어졌습니다.
Q. 걱정이 너무 많아서 쉬어도 쉬는 것 같지 않아요.
A. 이건 걱정의 양이 많은 것보다, 원치 않는 타이밍에 걱정이 불쑥 떠오르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매일 저녁 정해진 15분을 걱정 전용 시간으로 만들어 그 외 시간에는 "나중에 하기"로 미루는 능동적 지연 행동을 연습해보시길 권합니다. 제가 직접 해봤을 때, 처음엔 어색했지만 걱정에 대한 통제감이 생기면서 나머지 시간이 조금씩 가벼워졌습니다.
Q. 나는 장점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아서 자기수용이 잘 안 돼요.
A. 장점이라는 것은 타인보다 뛰어난 능력이 아니라, 내 안에서 그나마 나은 것을 말합니다. 비교 기준을 외부가 아닌 나 자신으로 바꾸면 장점이 없는 사람은 사실상 없습니다. 자기수용도 마찬가지로, 부족함을 없애고 나서 나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부족함이 있는 상태 그대로를 거부하지 않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결론
번아웃을 겪고 나서 제가 가장 뼈저리게 배운 것은, 인생이라는 긴 마라톤을 완주하려면 스스로가 자기 페이스메이커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페이스메이커란 마라톤에서 선수 옆에서 속도와 컨디션을 점검해 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인데, 제 삶에서 그 역할을 해줄 사람이 늘 곁에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제가 내린 결론은 이렇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일은 감정이 아니라 행동이고, 그 행동은 거창하지 않아도 됩니다. 아침 물 한 잔, 걱정 시간 15분, 오늘은 흐린 눈으로 넘기기. 이 사소한 것들이 모여 다음 고통이 왔을 때 조금 더 단단하게 버틸 수 있는 몸과 마음을 만들어줍니다. 아직도 저는 연습 중이지만, 적어도 이제는 제 마음이 지쳐 있다는 신호를 전보다 조금 빨리 알아차립니다.